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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와 운동화

나는 원래 운동화를 신는 사람이 아니었다. French sole에서 때마다 플랫슈즈를 무더기로 샀고 이십대 때 병원 근무 내내 그것만 신었다. 플랫슈즈 신고 유럽 여행도 홀로 다녔다. 밑창이 떨어져서 어느 호텔에서 버린 기억도 있다. 근무도 여행도 모두 플랫슈즈를 사고 버리고 하며 거의 15년을 신었던 것 같다. 내가 30대까지 서식했던 아주대 병원에서는 의료진은 대개 구두를 신었다. 특히 의사 전용 엘레베이터가 따로 있었기 때문에 예의 발라야 하므로 드라마 등과 달리 크록스 같은거 신고 낮에 돌아다닌 적도 없었다.

French sole ballet flats. 신사역에 있었고 지금은 철수했다.

그런데 원주에 와서 입사 오리엔테이션 하던 날도 그랬고 호텔을 가도 그랬고 회식을 하던 날도 그랬다. 많은 사람들이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교수님들은 진료 중 대개 그냥 편한 신발을 신고 계셨고 젊은 교수들은 많이들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그런 환경의 영향을 받아 나도 원주에 오면서 이런 저런 운동화를 사 보기 시작했다. MZ 들은 비싸거나 구하기 어려운 제품에 시간과 노력을 들여 구매하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표현한다고 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MZ가 아닌 것 같다. 다시 아디다스가 뉴발란스가 핫해지고 나이키는 주가가 떨어진다는 레트로 열풍의 시대지만 사실 내 세대라면 그런건 고등학교부터 대학 다닐 때 다 신었던 것들이 아닌가. 나는 내 발이 편한 에어맥스 95 위주로만 이런 저런 색깔을 사고 있다. 요즘에는 양말 길게 올리고 운동화를 신는다는데 난 여름에 그렇게 신는 거는 영 어색해서 오니츠카 타이거의 슬립온을 신고 다니고 있다.

에어맥스 95. 발볼이 좁고 발이 긴 내게 오래 신고 걷기에는 이만한 게 없다.

학회장은 원주가 아니라서 학회용으로 플랫 슈즈 몇개는 갖고 있다. 그런데 운동화를 신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불편함 모르던 구두들이 다 불편해졌다. 게다가 요즘은 원로 교수님들도 학회장에서 편한 운동화 같은 구두, 캠퍼 같은 스타일로 타협을 보시는 것 같고 젊은 의사들 일부도 연자로 무대에 서야 하는 날이 아니면 편한 신발을 신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직은 스포츠 보다는 패션 브랜드에 가까운 운동화 아닌 운동화 같은 것들을 신는 것을 예의로 생각하는 것 같다. 어쨌든 일상용으로 반드시 구두만을 예의 있게 해석하지 않는 고마운 세상이 되면서 구두를 많이 가질 필요도 없어졌고 구두 선택에서 실용성의 중요함은 삭제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구두를 신는 날은 완벽하게 예쁜 구두다운 구두를 신고 싶단 생각을 처음으로 하기 시작했다. 계절별로 아주 예쁜 구두를 컬렉션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략 3일간 구두로 인터넷을 떠돌았다. 그리고 도달한 지미추. 처음에는 플랫 슈즈를 보았는데 5 cm 미만의 스틸레토 힐들이 아름다워 보였다. 직접 보고 신고 싶어졌다.

생각보다 내 사이즈 재고는 많지 않았는데 그래도 가장 마음에 든 모델에서 재고가 있었다.

평일 저녁에 여주 아울렛에 갔다. 지난 몇 년간 신발을 수도 없이 여주에서 샀건만 ‘지미추’는 처음 들어가 보았다. 예쁜 taupe 색상의 구두 한켤레가 눈에 들어왔다. 내 피부 톤과 너무 찰떡인 스틸레토 힐이다. 심지어 발이 아주 편했다. Cheri 라인은 아이코닉하고 신상이라 할인 폭이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에 쏙 들었다. 확실하게 아름다운 구두가 주는 시각적 즐거움과 마음에 들어 선뜻 소유했다는 내 현재의 성취들에서 오는 만족감과 감사함이 느껴졌다.

신발을 완벽한 걸 사고 나니 나이 들어서도 그 나름대로 아름답고 싶은 욕망이 차오른다. 계속 늙어가겠지만 그래도 꽃꽃하길. 그리고 당당하길, 이해력도 기억력도 판단력도 잘 관리하길… 그러니까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자세를 바로 하고 생활을 잘 하자는 다짐이 든다. 어느 자리에서 완벽한 힐을 신고 다채로운 색상을 선택하는 스스로가 취향일 뿐 허영으로 보이지 않게 잘 늙자는 생각도 들었다. 구두 한켤레 사면서 많은 생각이 들고 기분이 좋았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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