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다는 게 위로가 된다

사람은 취약하다. 사람의 취약성을 아끼는 마음은 그러나 때로는 내 취약함을 합리화하는 방패가 되기도 한다. 유혹에 약할 수도 있고 의지가 약할 수도 있다. 순간의 즐거움을 가장 우선 순위에 놓고 사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더 많은 책임을 요한다. 사람은 상황 속 자신의 모습을 평가하는 재능이 있다. 미울지 고울지 속일 수는 있어도 스스로는 끝끝내 안다.

취약한 사람의 본성을 마주하고 이길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선택 사항은 제도권 밖에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 두려워하는 바로 그것. 제도권 밖에는 수많은 편견과 폄하가 존재한다. 그 폄하를 이겨낼 자신이 없을 때 우리는 욕망을 버려야 하지만 대개 표리부동한 삶을 택한다. 그리고 이 우매한 짓은 내 탓이 아니라 상황 탓이라고 합리화 한다.

내가 잘한 것이 있다면 그런 굴레에서 내가 예외가 될리 없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다는 거다. 오히려 더 취약할 수도 있었다. 결은 바람도 그려내는 물 같고 속은 쌓이고 쌓이는 흙 같은 사람은 마음 때문에 진흙탕 같은 삶을 살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던, 봇물이 쏟아지던 20대와 순수함은 진부하다던 30대를 돌이켜 본다. 창문을 통해 그저 부는 게 바람인데 마음을 숭숭 뚫기도 하고, 날이 그저 더울 뿐인데 속에서 불이 끓기도 하는 그런 거. 선택은 할 수 있어도 조절은 안되는 건 특정의 시간에 제한되지 않는다. 결은 사방으로 향한다. 그런 것들은 나를 돌아보게 했다.

가득차 버리면 아무것도 마음대로 못할 가능성이 커진다. 취약한 본성은 받아들이는 게 편하다.

Blooming, 2001-2008, by Cy Twombly

마흔을 불혹이라고 하니 크루즈 모드인 줄 알았다. 이제는 안다. 삶은 무료할 때 무장해제가 되고 그 순간 끼어드는 것들은 다양한 모습이란 것을. 끼어드는 일에는 결국 좋은 일도 있고 처음부터 나쁜 일도 있고 좋다가 나쁘다가 하는 일도 많다. 불혹은 결국 주변의 목소리가 끝난 것이 아니라 비로소 나를 안다는 거다 싶다. 어떤 형태로든 사건이 발생할 때 내가 좋은지 아닌지를 들여다보는게 우선 순위가 되면 그 때는 내 선택 그 자체를 옳은 일이라 여길 수 있다. 돌이켜 후회일 수 있어도 지금은 관망하면서 묻어 두는 선택도 해낸다.

생은 짧지만 길고, 내 성취는 유한하고. 그러니 어느 순간 돌아보게 된다. 나는 옳은 곳에 있는가. 내 취약성은 그 사이 조금 자라 났다. 자주는 옳은 것이라고 위로하고 가끔은 위로로 옳은 것을 만들어 낸다. 내 극심한 본성은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물을 때조차 흐르다가 막히다가를 반복한다. 옳은 것이란 있지도 않는데 애써 만드는 위로일까. 취약한 나에게는 많은 순간 그저 방석이 필요했을 뿐이었고 그 사실이 부끄러우니 지금이 옳고 고귀하다 여기지는 않았을까. 옳다는 걸로 위로가 되지 않으면 무엇으로 내 방석을 만들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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