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 가드닝, 작업실, 계단오르기, 병원 일상, 논문, 소비본능, 여행 (feat. 휴대폰 사진 털기)

이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한해의 절반이 흘렀다. 이 시국에도 올해는 대면학회를 힘겹게 지속했다. 학회에서 만나는 동료들은 저마다 학회에서야 내가 교수였다는 걸 느낄 수 있어서 좋다며 서로 위로하곤 했다.

춘계학회는 대한천식알레르기학회가 시작했다. 국제학회였고 워커힐에서 했다. 강의도 했고, 스승의 날쯔음이라 제자도 만났다. 고맙게 건네받은 제자의 편지와 선물을 두르고는 워커힐 호텔방에서 인증샷을 보내보며 서울의 봄날씨를 만끽했다.

어느덧 만삭인 승원이가 다음날 아침에 호텔로 와서 같이 티타임도 가졌다. 일층에 전시된 차구경도 하였다.

의정 사태로 해외 학회를 다 포기한 올해에 처음으로 참가한 국내 학회로 당연히 1박 2일은 흘러가는 일정인데 꿈만 같았다.

곧 이어 열린 KAPARD 춘계학회는 더케이서울호텔에서 했다. 실내가 올드하고 뷰가 트여 있는 건 좋았다. 1층 로비에 갈비탕도 맛있었고. 누구랑 같이 자긴 좀 그렇고.. 비지니스호텔로 적당한 것 같다. 7월 무더운 여름 한가운데 열린 연수강좌는 호흡기가 주제여서 흥미롭게 들었다. 성모병원 지하에서 아이스크림 먹으며 느낀 찰나의 여유. 어느덧 불어난 우리팀과 다 같이 점심 먹은 게 좋았다.

가드닝 하기 몹시 힘든 계절이다. 평생 땀을 별로 안 흘리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바깥일을 안했던 게다. 요즘 나는 스스로 가드닝이 지닌 치유 효과를 체험하고 있다. 두통도 줄고, 짜증도 줄었다. 초록색의 힘인지 잡초를 제거하면서 합법적으로 ‘악을 제거’하는 활동을 해서인지 향기 때문인지 햇살 때문인지 이 모든 것 때문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더워 죽겠는데도 갈 수 있는 날은 나가고 있다. 덕분에 시커매지고 피부도 늙고 있지만 무럭무럭 자라는 정원이 내 마음속 이미지로 각인되어 위로가 된다. 요즘 책 ‘정원의 쓸모‘를 읽고 있다.

작업실에서 즐거운 건 가드닝 뿐만 아니다. 교토에서 잔뜩 사온 송영당 에센스는 여름 무더위를 낭만적으로 입힌다. 얼마전 강남 라이온스클럽에서 나온 빈티지 LP들로 채워지는 음악, 그리고 뒷마당에서 뜯어 우려 먹는 민트티. 이 모든것이 같이 짧은 시간 머무르면서도 행복한 기분을 끌어낸다. 이렇게 목적 없이 이뤄진 공간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은밀히 있음에 행복을 느낀다. 감사한 일이다.

여름이 되자 감자전이 더 맛있어진다. 집에서 요리가 더 힘드니 자주 시켜 먹는 것들을 찍어 놓고 보니 나트륨과 포화지방산의 비중이 높다. 좋아하는건 못 줄이겠고 맛있는 것들 계속 먹으려고 병원에서 계단 오르기를 시작했는데 꽤 효과 있다. 꾸준히 해야지.

병원은 계속 참혹한 상태이다. 이러다가 억울한 죽음이 생기지 않게 최선을 다해서 틀어막고는 있지만 내 몸과 정신은 다소 힘에 부친다. 최대한 건강히 이 보릿고개를 넘고자 한달 중 거의 1/3을 보내게 된 당직실에서 식물도 키우고 책도 읽고 TV도 보기 시작했다. 일요일 24시간 동안 당직 서던 어느 날 젬스가 고맙게도 잠시 왔다. 같이 먹는 파파존스가 그렇게나 맛있었다. 당직실에서 혼자 있는 시간은 어쨌거나 불편하다. 새벽에 콜이 오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TV도 안보게된다. 심적으로 힘든걸까. 그러던 어느날 어릴 때 진료실에서 매번 울던 꼬마가 세살이 되어 예쁘게 가운, 스크럽복, 청진기를 다 차려 입고 진료를 보러 왔다. 애들은 참 귀여운데 나라가, 그리고 우매하고 욕심뿐인 어른들이 많이 잘못하고 있는 것 같다.

올해 첫 성과물

그래도 교수는 연구를 해야 한다는, 내일 죽어도 오늘 나무는 심는다는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까 이게 치유의 힘이 있다. 계속 당직 서고 진료 보는 것만 하는 소위 액팅 업무에서 차오르던 깊은 분노는 논문을 써야 가라 앉는다. 그래서 썼고 하나 출간되었다. 올해가 가기전에 세개 출간을 마무리 하는 게 현재 목표다.

어리고 순수한 것들은 귀엽다. 몬치치 모으기는 요즘 잠잠한 중이다. 아이돌 소희가 들고 화제가 되어서 리셀을 하는가보다. 일본 내부에서도 구매 갯수 제한이 붙었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구매가 힘들어 탕진잼은 잠잠해졌지만 핑크치치는 항상 예쁘다. 금치치, 핑크치치는 살 때 넉넉히 사서 쟁겨두는 나의 목적은 뭔지 나도 모르겠다. 이제냐는 피글렛을 좋아한다. 이주현은 테슬라를 좋아한다. 계속 같은 성질의 사물에 이끌리는 건 어떤 습성이 남아 진화했기 때문일까. 요즘 책 ‘소비 본능‘을 읽고 있다.

사진을 모아놓고 보니 한결 같이 빨간색도 참 좋아한다. 베스파 빨간색 같은 퓨마 스피드캣 레드를 얼마전에 검색했었다. 요즘은 페라리에 빠져서는 사진을 전화기 배경화면으로 해놓고는 즐거운 헛된 꿈을 꾼다. 정확히는 이탈리안 레드가 좋은 건데 파이브 가이즈 빨강이 저 색인거는 사진 모아놓고 깨달았다. 주말에 또 먹으러 가야지.

올해는 악세서리 사는 재미를 붙인 것 같다. 백, 구두 이런 것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좋은 구두를 신는 건 확실한 즐거움을 줬다. 이태원 몬드리안 호텔 일식집인 타카 TAKA에 편교수님이 식사 자리를 준비해주셨다. 스승님도 나오셨고, 전교수님도 나오신 자리. 오랜만에 식품알레르기 연구 멤버들끼리 이런 저런 이야기를 길게 나누는 즐거운 자리에 시골쥐가 구두를 신고 나갔다. 오늘 영화 ‘a family affair’가 넷플릭스에 떠서 보았는데 니콜 키드먼이 데이트를 나가는 자리에 수없이 갈아입고 챙겨 신은 구두로 등장한 지미추. 검정 드레스에 든 예쁜 골드 파우치도 지미추다. 좋은 자리에서 발휘되는 이 제품만의 힘이 있다. 다음달엔 책 ‘오십의 멋‘을 구매해서 읽어보려고 한다.

사진털기의 마지막은 어제 있었던 일이다. 어제 밤 제일 먼저 한 일은 내년 샌디에고 학회 준비였다. 내년 부터는 해외 주요 학회는 그래도 일년에 한 개 이상 참석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왕 인생이 이렇게 된거 죽도록 일하고 여행으로 한해의 추억을 남기는데 소홀하지 않으려고 한다. 당장 9월에 방문할 홋카이도에서 발이 될 차량을 예약했고 이어서 12월 크리스마스 여행지를 결정했다. 젬스 믿고 가는 중국, 이번에는 샤먼이다. 샤먼에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이 있어서 예약 완료. 조식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