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교동과 서촌. 강원도에 살게 되면서 이 핫한 곳들에 대한 접근성이 안좋아졌다. 이번 구정 마지막 연휴일을 그래서, 1박 2일간 마포에 머물며 서촌까지 가보기로 했다. 숙소는 홍대입구역에 위치한 매리어트 계열인 오토그라프 Ryse로 예약했다.
예약하고 보니 테슬라 데스티네이션 차저도 있는 곳이더라. 테슬라의 정식 DC 콤보 어댑터가 상반기에 출시 예정이다. 아직 안나왔단 이야기. 나는 주로 완속형 충전기를 들고 다니며 충전하는데 여행 가서 여기 저기 돌아다니려면 항상 충전을 생각해야한다. 서울 안에서 크게 차로 돌아다닐 일은 계획하지 않았지만 데스티네이션 차저, 소위 데차가 있단 사실만으로 맘이 든든하다.
데차에 차를 충전시키고 얼리체크인을 했다. 제일 먼저 호텔 3층에 위치한 차르에서 고민 끝에 버거와 샴페인 한잔을 시켰다. 날이 날인지라 가족 단위의 식사 모임이 좀 있었고 유난히 큰 목소리는 슬쩍 거슬린다. 양이 넘 많았다. 포테이토 칩은 남겼다.
점심이 지나자 홍대입구역에 젊은 인파가 쏟아진다. 아, 요즘 대학생들은 이렇게 입는구나를 눈으로 느낀다. 나는 내가 젊게 입고 사는 줄 알았는데 옷의 길이와 폭, 헤어 스타일이 많이 달랐다. 내가 대학 다닐 때쯤 유행했던 게 다시 대학가에 유행하고 있다. 2020년에서 온 나의 GAP- baggy한 crop 팬츠가 90년을 만나서 신선한 룩이 되는 순간이다. 아우터도 박시하다 . 형태는 90년대지만 달라진 건 색이다. 무채색 혹은 크림색의 향연이다. 프란체스카가 화장을 바꿔 다시 등장했구나.
편집샵, 1984에 들렀다. 기대를 좀 했지만 프라이탁 물건은 많지 않았다. 편집된 물건도 나한테는 크게 신선한 게 많지 않은 구성이라 이런 저런 구경을 하고 나섰고 이어 길을 걷다 발견한 시공간. 금속 알레르기 때문에 대부분의 악세서리가 구경거리인 나. 조명이 어두워서 분위기는 좋으나 막상 물건 고르는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확실한 유행은 여기서 알았다. 곱창 밴드와 집게 핀이 이토록 세련되게 많이 진열될 일인가. 유행은 돌아왔고 물건은 그때보다 많아졌다. 과잉의 시대. 한켠에 놓인 사진책들이 마음에 들었다. 다시 길을 걸었다. 아케이드 서울이 눈에 띄어 들어가 보았다. 여기서 한참 보냈다. 예쁘고 괜찮은 옷들이 톤별로 잘 정리가 되어 있다. 조도가 어두워서 막상 사기는 어려운 상황인 게 아쉽긴 했다. 하지만 분위기와 유행을 읽기는 좋았다. 스몰 사이즈 바지를 입어 보았다. 엉덩이는 맞고 허리는 타이트하다. 내가 20대 허리는 아닌가보다 한다. 3층에 위치한 텍스처는 특히 마음에 들었다. 아방가르드한 느낌이란 이런 것이지. 소매가 길다. 내 팔이 긴편인걸 감안하면 이렇게 입는 게 유행인가보다. 나는 자켓이 늘어지니 이상하다. 내 감성은 시대에 뒷처진 거라 하자. 아케이드 서울에서 나올 때쯤부터 속이 안좋았다. 버거가 좀 무리였나보다. 저녁은 패스하고 숙소에 돌아와서 쉬었지만 아픈 배가 밤새 요란했다.
다음날 아침. 도저히 뭔가를 먹고 싶지 않은 메스꺼움이 가득했다. 사실 나서고 싶지도 않은 기분이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여느 때와 다른 휴가의 마지막 날 아침이었다.
아홉시에 문을 연다는 앤트러사이트에 오픈 시간에 맞춰 가보기로 한다. 네이버 지도를 켜서 가는 길을 외운 다음 길 풍경을 꼼꼼히 보며 걸었다.
흐린 아침, 고요한 서교동 길 빌라들이 펼쳐지는 골목 한켠에 위치한 앤트러사이트는 약간은 음울하나 공간의 소재가 빈틈이 없고 커피가 그 분위기를 지배하여 음악 없이도 블루지하다. 참새들의 새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로 고요한 아침이다.
원두의 이름들이 이미지적이다. 그 중 공간의 첫느낌과 가장 어울리고 한편으로는 내 뱃속 상태와도 가까웠던 ‘윌리엄 블레이크’로 만든 모카포트+라떼를 한잔 주문하며 얼그레이 초컬릿 한조각을 추가했다.
2층에 앉아 커피를 끓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도 같은 모카포트가 있는데 싶어 내심 그 맛은 큰 기대를 안했던 터였다. 왠걸. 한 모금 들어오는데 너무 만족스럽다. 아, 이제 커피도 우리가 E탤리보다 낫구나.
천천히 초컬릿과 함께 먹는 커피 한잔이 좋지 않던 컨디션을 제대로 리부팅시켰다. 감사했다.
서둘러 체크아웃을 하고 서촌으로 향했다. 경복궁 지하주차장에는 하이브리드와 경차 전용 주차 공간이 있더라. 테슬라로 차를 바꾸고 어딜 가도 융숭한 대접을 받는구나. 넉넉하게 주차하고는 봐 두었던 서점으로 향했다.
서촌 그 책방. 아직은 점심 전이기도 했고 명절 영향도 있어 서촌의 골목길도 조용했다. 고요한 아침에 서촌은 아무래도 좋겠지만 특히 서점은 그러하다. 책의 큐레이팅은 말할 것도 없이 훌륭했다. 나는 우울하거나 비판적인 이야기를 읽고 싶은 때가 아닌지라 주로 환경과 예술에 관한 책을 골랐다.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티엔미미가 눈에 띈다. 웨이팅도 별로 없다. 뭘 많이 먹을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여서 메뉴도 적당해보인다. 챵펀을 하나 시켜서 요물요물 먹었다. 명성만큼 막 맛있고 그렇지는 않다. 대만에 가고 싶다. 타이페이에 죽여주는 집들 많은데….
길은 건너 주차장을 향하던 길에 향에 이끌러 들른 그랑핸드 GRANHAND. 우연히 길을 걷다 들어가 본 집인데 오늘 처음 들었다고 하니 더 자세히 설명을 해주신다. 인싸 브랜드인가?! 공간이 좋다. 색이 따뜻하고 향은 바삭하다. 음악은 실키하다. 좋았다.
집에 마침 자스민 오일을 태울 버너가 마땅치 않았던 터라 하나 사면서 시그니처 향수 중 하나를 골랐다.
내 평생 처음 사보는 한국 향수이다. 향은 완전 중성적이다. 향수병의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 우리 특유의 그대로 두는 여백미를 잘 간직하고 있는 디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