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를 다녀와서

코로나 19는 내 마지막 30대를 완전히 잠식했다. 마스크를 낀 채로 돌아다니면서 은글슬쩍 진행된 노화도 아쉽지만 30대에 그럴듯한 몸매로 리조트에서 찍어보는 그런 사진들. 그것도 다 쉽게 가져가 버렸다. 유한한 인생이라 모두에게 순간은 아쉬우니 이 길었던 3년은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다.

도쿄의 영혼 같았던 센소지절

봉쇄정책에 호흡기 감염 환자가 갑자기 줄면서 소아과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내 삶도 많이 바뀌었다. 대학에서, 종합병원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주업무였지만 응급실, 병동의 1차 진료선을 담당하는 인력이 부재하게 되면서 결정에 이르는 전 과정이 내 업무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아슬아슬한 시스템에 아무도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할테니 사실상 연구자로서 내 인생은 반토막이 났다. 그나마 주 2회 다니던 발레를 지속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주 2회 당직을 서느라 집에도 못 들어온다. 얼마전 건강 검진에서 당당하게 1주일에 단 1회도 운동을 하지 않는다고 작성했다.

벚꽃으로 유명한 도쿄 나카메구로, 아기자기 생활 잡화점 구경하기 좋다

실로 오랜만에 휴가를 그깟 도쿄 정도 비행 거리로 가면서도 몹시 좋았던 것은 그래서리라. 아주 가깝지만 시선 머무르는 곳에 구질구질한 것 없어 눈이 편안한 것 만으로도 내게는 완벽한 휴가였다. 온갖 현수막, 입간판, 길을 가로지르는 전선, 아무 곳에나 박혀있는 가로등은 우리나라 시골 도시의 시그니처다. 그 속에 3년을 갇혀 이국은 커녕 감수성조차 다 얼려붙인 채 살았다. 서울도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불법 주정차들, 마구 돌아다니는 오토바이들, 인도를 위협하는 문화. 나는 어지럽고 지옥 같은 교통 체증에 무표정했다.

도쿄 거리에서 자주 마주치는 빈티지 카들과 왠만해서는 밀리지 않는 쾌적한 도쿄 시내

도쿄의 12월은 온화했다. 하늘은 정말인지 하늘색이였고 구름은 정말인지 구름색이였다. 이 당연한 것을 오래동안 희미한 잿빛으로 느끼며 살았다. 긴자 six 건물 13층에서 먹는 우나기의 불향과 감칠맛이 도는 쌀밥은 상상을 못했던 경험이었다. 단정하게 살살 간장에 구워주시는 스키야키를 받아먹는 촉감은 부드러웠다. 이른 아침 킷사텐에서 맛본 융커피는 혀를 감고 긴 시간 돌고 돌고 또 돌며 새로운 커피를 열어주었다. 사람이 걷는 아름다운 밤의 조도가 좋았다. 서점에 진열된 책들은 LED 모니터에 갇힌 눈에 부드러운 즐거움을 선사했다.

오랜 카페를 의미하는 킷사텐, 킷사텐을 대표하는 긴자의 Tricolore 융커피

나만의 속도로 산다는 것. 잘 제작된 것은 긴 시간 반복되기만 해도 가치 있다는 것을 믿는 것. 그 문화 속에서 느리게 하나 하나 정비하여 운영하는 도시는 이상하리 만큼 편안했다. 도쿄 긴자 유니클로의 디스플레이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적으로 일본이 보였다. 왜 도쿄에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플래그쉽을 만드는데 주저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유동인구와 소비력도 중요하겠지만 브랜드를 상징하는 가게를 운영하는데 있어 이들만큼 믿을만한 자들이 있을까. 그들도 훈련받았겠고 우리도 훈련하는데 무엇이 디테일 차이를 이렇게 분명하게 끌어내나 싶었다.

세상에서 다 사라진 것 같았던 잡지들이 츠타야 서점엔 넘쳐난다

건물 유리를 아침마다 닦는 업체들이 무수하게 보였고 꽤 젊은 사람들도 그런 일을 선택하고 있었다. 새벽으로 도쿄의 길을 정리하는 청소 차들은 수없이 돌아다녔다. 우리나라에서 겨우 한대가 바삐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하는 모습을 본다. 심지어 빨리 일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아슬아슬하게 달리는 청소차 뒤에 매달려 다니는 문화는 아직도 여전하다. 이런 일의 진행 패턴은 나에게도 적용된다. 왜 우리는 적은 인력이 더 많은 일을 하도록, 모든 일이 도매상처럼 돌아가는 데 합의한 걸까. 인사부터 천천히 나누는 문화. 천천히 타이핑 하고 꼼꼼히 기록하는 문화. 그런 완벽은 내가 지양하는 바가 아니어야 한다. 나는 무조건 빨리, 안 밀리게, 애가 울기 전에. 말을 끊어가면서 최대한 빨리 처방을 내야 한다. 왜? 외래를 보면서 틈이 나면 병동에 가야 하고 틈이 나면 응급실에 가야 하니까. 수련 과정에도 응급실에서 오가는 고성은 주로 ‘속도’에 관한 것이였다. 응급실인데 왜 빨리 안보냐는 것. 우리나라 응급실은 중증 환자가 오는 곳이라기 보다 빨리 진료보고 싶은 사람들이 오는 형태에 가깝다.

나리타 공항 스시 Kyotatsu, 공항 풍경을 바라보며 천천히 즐기기 좋다

나는 다른 누구보다 청진을 잘 하는 소아과 의사지만 다수는 내가 청진을 하는 짧은 순간에도 내게 말을 건다. 청진만 잘 해도 진단의 9할에 이를 수 있지만 그런 내 실력은 다른 사람과 차별화 된 수준의 ‘장인급’이라 평가 받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짧게 쉽게 이르는 진단에 가격을 지불하는 것에 다수는 합의하지 않는다. 미니멀 한 old-fashioned 한 것에 가격을 치르는 문화가 어려운 나라다. 결국 나도 가장 빨리해서 싼 가격을 n수로 매우는 문화에 합의했다.

12월 도쿄는 일루미네이션이 밝힌다. 롯폰기, 미드타운, Ebisu, 모두 아름답다.

도쿄를 다녀와서도 일은 어쩔 수 없이 돌아간다. 다만 도쿄에서 내가 소비자로서 받은 시각적, 촉각적, 청각적 완성도와 그로부터 전달되는 편안함을 나도 가능한 갖고 싶다고 생각 하고 있다. 일을 할 때는 참고 기다려주는 상대가 없으므로 ‘시간적’ 편안함은 실천할 수 없겠지만 집에 있는 동안은 시간적 편안함을 내 본성에 잘 스미게 하루를 운영하자는 생각을 갖게 된 여행이다. 사회의 요구에 나를 매몰시키지 말 것. 휩쓸리지 않는 것이 지성이어야 하지만 실천은 어렵다. 여행만큼 나를 되돌아 보게 하는 경험은 없단 것을, 잊었던 기억을 되돌리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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